『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25기』 북중미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흐름 10주 차: <남미병에 걸린 두 나라 이야기>
안녕하세요!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사무국입니다.
오늘 리뷰는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25기 10주차 입니다!
저번 시간에는 쿠바와 브라질 이야기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지난 시간의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25기』 북중미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흐름 9주 차: <쿠바와 브라질 이야기>
오늘은 세계통찰 시리즈 저자 이지성 작가님과 함께
남미병에 걸린 두 나라 이야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자, 그럼 재미있는 역사경영 시간으로 가볼까요?


Part 1. 포퓰리즘의 원조 국가 아르헨티나
백인의 나라와 팜파스의 축복

과거 아르헨티나에서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일이 발생합니다. 스페인은 아르헨티나 정복 초기부터 원주민 몰살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Julio Argentino Roca) 장군이 1879년에 원주민 대학살을 일으켰으며, 원래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고 살고 있던 인디오들을 모두 죽이고 백인들이 유입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오늘날 남미의 유럽 국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록 남미 땅에 살지만, 유럽인이라는 생각이 굉장히 강하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한 남미에는 팜파스(Pampas)라고 하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팜파스는 곡창지대로 굉장히 비옥하기 때문에 무엇을 심든 잘 자랍니다. 같은 남미 국가 중에서 브라질이나 쿠바는 사탕수수, 고무 등의 상품작물을 수출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국가 주력산업은 바로 곡물 수출이자, 농업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곡물 수출과 농업으로 돈을 많이 벌게 됩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곡물 수출과 농업 보다 더 큰돈을 벌 수 있게 됩니다. 앞서 말했 듯이 아르헨티나에는 팜파스가 많기에 소를 풀어서 키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소를 키워서 얻어낸 소고기를 19-20세기 전까지는 수출할 수 없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유럽으로 소고기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적도를 지나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고기가 모두 상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20세기 초에 냉동선이 등장하면서 냉동상태로 소고기를 수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유럽으로 소고기 수출을 시작하면서 곡물 수출과 농업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영광스러운 과거

아르헨티나는 과거 세계 5위의 1차 대전 이전까지 유럽, 미국보다 부유한 경제대국이었습니다. 곡물 수출과 소고기 수출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정말 많은 돈을 얻게 됩니다. 유럽에 소고기를 수출하고 받은 달러를 금괴로 바꿔서 아르헨티나로 들여오면, 아르헨티나의 중앙은행 금고에 금괴가 꽉 차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복도에 쌓아놓을 정도의 돈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그 많은 돈으로 가장 먼저 인프라를 구축했습니다. 1913년에 중남미 최초의 지하철을 개통하고, 많은 고속도로 역시 건설합니다.
스페인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인디오들을 모두 죽이고 유럽인들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다 보니 남자 노동자들만이 유입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당시 아르헨티나로 온 이주민 중 여성 인구 비율은 2%밖에 되지 않았고, 아르헨티나에는 심각한 성비 불균형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아르헨티나에는 한 가지 문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적은 여성 비율과 압도적으로 많은 남성 비율로 인해 아르헨티나 남자들의 여성에 대한 욕구가 춤으로 승화되었으며, 이러한 춤이 바로 '탱고'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하여 유럽까지 번져 남녀 간 사교의 장을 만들어준 춤인 탱고였지만, 아르헨티나에 군사 정권이 들어왔을 당시에는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포퓰리즘의 대명사-페론주의

후안 페론(Juan Domingo Perón)은 야심을 품은 노동부 장관이었습니다. 후안 페론은 이탈리아 노동자 출신으로, 아버지가 농장주였습니다. 후안 페론의 아버지는 자신처럼 농장주가 되길 바랐지만, 후안 페론은 권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을 원했던 후안 페론은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여 노동부 장관이라는 권력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습니다. 후안 페론은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 배우 에바 페론(Eva Peron)의 인기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과거부터 힘들게 살아와 오직 본인의 힘으로 성장한 에바 페론 역시 누구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원했기에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그들은 1945년에 결혼을 하여 함께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에바 페론의 인기로 후안 페론은 1946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에바 페론은 영부인이 되었습니다.
후안 페론은 히틀러를 가장 존경했습니다. 이 때문에 후안 페론은 대통령이 된 후 정책을 도입할 때, 히틀러의 정책이었던 국가사회주의 정부 모델을 그대로 도입하게 됩니다. 먼저, 폐쇄 경제를 가지고 내수 위주의 정책을 시행해야 자신의 권력을 극대로 행사할 수 있기에 첫 번째로 산업의 국유화를 도입했습니다. 이후 노동자 위주의 정책을 도입하여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근무시간 역시 대폭 단축시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 의료, 국민연금 등의 복지제도를 대폭 강화합니다. 이러한 정책의 도입으로 아르헨티나의 재정은 점점 나빠져갔습니다.
히틀러를 존경했던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를 나치의 안식처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후, 해외로 도망치려는 나치 전범들에게 인당 최소 10만 달러를 받고 5,000장 이상의 아르헨티나 여권을 발부해 줍니다. 후안 페론은 1955년에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여 쫓겨나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와 권력을 잡고, 기득권층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만을 위한 정책을 펼칩니다. 이 때문에 국민 3명 중 1명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등의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게 됩니다.
콘도르 작전

후안 페론이 죽고 육군총사령관 호르헤 비델라(Jorge Rafaél Videla)가 1976년 3월 쿠데타로 권력을 잡습니다. 비델라는 오늘날 아르헨티나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국의 후원을 받으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모두 좌익 세력으로 몰아 무차별적으로 처형하는 등의 공포 정치를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아르헨티나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닌 당시 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러한 더러운 전쟁(Dirty War)이 일어났습니다.
1970-80년대에 아르헨티나 등 남미 6개국의 친미 독재자들이 미국의 묵인 아래에서 반공을 명분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한 활동을 '콘도로 작전'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의 주도 하에 친미 세력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당시 미국은 콘도로 작전을 시행하는 남미 국가들의 뒤에서 후원해 주며 작전을 승인시켰습니다.
이후 1978년에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억제와 아르헨티나의 국제적 이미지 개선이라는 명분으로 제11회 월드컵을 개최했습니다. 이는 국민의 관심을 축구로 돌리기 위해 축구를 장려했으며, 축구를 통한 국민 단합에 성공합니다.
포클랜드 전쟁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군부가 몰락하는 계기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계기를 마련한 전쟁이 바로 '포클랜드 전쟁'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물론, 심각한 국민 탄압으로 민심을 잃어가던 비델라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영국령 무인도였던 포클랜드를 1982년에 침략하게 됩니다. 당시의 영국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영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을 선택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납니다. 아르헨티나가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미국의 지원입니다. 당시 미국 레이건 (Ronald Reagan) 대통령과 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던 대처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요청을 수락한 미국으로 인해 영국은 미국의 지원 아래에서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미국의 지원보다 큰 이유는 바로 부패한 아르헨티나 군 수뇌부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모든 국력을 총동원하고 미국의 지원까지 받은 영국과 달리, 부패했던 아르헨티나의 군 수뇌부는 군수품을 빼돌리거나 불량품을 공급했습니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군사들은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거나 총알과 같은 군수품이 부족하여 죽게 되었고, 결국 전쟁에서 지게 된 것입니다.
부패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참전 병사 사후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국이 아르헨티나 군인의 시신을 수습해 무덤을 만들어주게 됩니다. 무덤을 만들면서 전사한 참전 병사들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아르헨티나에 요청했지만, 아르헨티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참전 병사들의 무덤에 '신만이 아는 자'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Part 2. 미인의 나라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와 기득권층의 담합

스페인 이민자 출신인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는 남미의 영웅이라고 불립니다. 볼리바르는 크리올료라고 하는 스페인 이민자 2, 3세 출신입니다. 볼리바르는 스페인이 계속해서 남미로 총독을 보내어 감시하는 등과 같이 남미를 압제하니까 이에 반대하며 혁명을 일으킵니다. 그는 1812년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에 입성하는 것을 시작으로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등을 독립시키고 스페인에 시달리던 남미의 노동자와 농민들을 해방시킵니다. 볼리바르는 남미를 완전히 통일하여 미국과 같은 하나의 강력한 연방 국가로 만들고자 했지만, 기득권층의 방해로 실패합니다.
볼리바르가 일으켰던 나라인 베네수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석유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끔찍한 자원의 저주의 시작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1918년 산유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가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를 처음 발견하고 베네수엘라 정부와 석유를 통해 얻은 돈을 나눠먹기 시작합니다. 베네수엘라 정부 역시 석유를 팔아 얻은 돈을 국민에게, 나라에 쓰지 않고 정부 고위 관료와 기득권층만이 돈을 나눠가지며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다른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불만을 갖지 못하도록 1958년에는 '푼토 피호 협약'을 맺어 기득권층에서 서로 권력을 나눠갖기도 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기득권층의 부패입니다. 기득권층이 소유한 5개의 상업방송과 10개의 일간지로 인한 국민 우민화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백인 남성 위주로 된 소수의 기득권층이 권력과 돈을 독점하며 국민을 우민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베네수엘라의 문제입니다.
우고 차베스와 사회주의 국가로의 전환

이렇게 문제가 많은 베네수엘라에 우고 차베스(Hugo Chavez)가 등장합니다. 차베스의 부모님은 모두 교사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정책 자체가 우민화 정책이었고, 의무 교육이 없는 것과 같이 나라가 교육에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굶주리면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차베스는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단이 가장 좋은 육군사관학교로 진학을 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진학 후, 소수가 권력을 쥐고 석유를 팔아 얻은 돈을 미국과 나누고 있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하다는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차베스는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으로 쿠데타를 계획하고 1992년 2월 실행에 옮기지만, 배반자로 인해 실패하게 됩니다. 사형 전 마지막 기자 회견에서 멋진 연설을 하여 국민을 감동시켰고, 그 인기로 인해 사면 당했습니다. 이후 정당하게 대통령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1998년 12월에 역사상 최고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당선 후, 차베스는 국민투표를 통해 기존의 헌법을 없애고 신헌법을 만들었습니다. 국호도 시몬 볼리바르 정신을 받아들여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으로 바꾸며 사회주의 국가로의 전환을 시작하였습니다.
차베스의 정책

차베스는 석유를 국유화시키면서 얻은 돈으로 복지 정책을 시행합니다. 학교를 대거 신설하고 무상교육을 전면 실시합니다. 특히 문맹이 많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도 함께 도입합니다. 덕분에 2700만 베네수엘라 인구 중 1700만 명이 이상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의사가 많고 석유가 없던 쿠바와 거래를 하여 쿠바에 하루 10만 배럴의 석유를 제공해 주고 연간 3만 명의 쿠바 의료 인력을 공급받습니다. 도시가 아니면 병원이 없던 베네수엘라의 소외받던 농촌에도 수천 개의 병원을 설립합니다.
한편 사회주의를 경계하던 미국은 베네수엘라로의 물자 공급을 끊게 됩니다. 이에 대항하여 차베스는 국영 슈퍼마켓을 베네수엘라에 도입합니다. 또한, 석유 값이 비싸면 비쌀수록 베네수엘라가 얻게 되는 돈이 많아졌기에 차베스는 고유가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란, 이라크와 같이 미국도 사이가 좋지 않은 국가들을 설득하여 고유가 정책을 함께 하자고 했으며, 설득에 성공한 후 석유의 값을 높입니다. 이로 인해 미국과는 사이가 더 안 좋아졌지만, 베네수엘라는 수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차베스 정부 때 유가가 오르면서 베네수엘라도 그에 따른 수익을 얻었습니다. 유가의 상승으로 베네수엘라의 GDP 역시 올랐으며, 돈이 생긴 만큼 복지 정책을 시행했기에 베네수엘라의 빈곤층이 감소합니다. 이렇게 빈곤층이 감소하고 GDP가 오른 현상은 모두 국제 유가 상승으로 인해 가능했던 혜택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정책의 후폭풍

베네수엘라를 성장시킨 차베스는 2013년 3월 5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국민을 위한 복지 정책을 시행하며 나라를 이끌던 그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슬퍼했습니다. 한편으로 복지 정책이 많이 시행되는 만큼 특권을 빼앗긴 기득권층은 차베스를 잡종이라고 부르며 ‘잡종이 나라를 망쳤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차베스가 죽고 나서 바로 석유 값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차베스가 죽고 후계자가 된 것은 니콜라스 마두로(Nicolas Maduro) 대통령입니다. 그는 차베스 정부 당시 버스 운전사로 활동했으며 정치적으로 전문적이지 못한 서툰 대통령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운이 나쁘게도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서 40달러로 폭락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베네수엘라의 수출이 감소하고 재정 역시 감소하면서 나라가 큰 가난에 빠지게 됩니다. 더불어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경제제재를 시작하면서 석유 산업이 붕괴되었습니다. 돈이 없어진 베네수엘라는 물건을 수입하지도 못했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1년에 130만%의 물가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베네수엘라는 산유국임에도 불구하고 주유소에 기름이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제25기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10주차 리뷰를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9주차에 이어 10주차도 역시 굉장히 유익한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저희는 제26기 역사최고위조찬으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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