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선진국 브라질?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vs 체 게바라? 자원부국 남미가 못 사는 이유?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25기』 북중미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흐름 9주 차: <쿠바와 브라질 이야기>

안녕하세요!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사무국입니다.

오늘 리뷰는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25기 9주차 입니다!

저번 시간에는 조용한 캐나다와 시끄러운 멕시코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지난 시간의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25기』 북중미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흐름 8주 차: <조용한 캐나다와 시끄러운 멕시코>

오늘은 세계통찰 시리즈 저자 이지성 작가님과 함께

쿠바와 브라질 이야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자, 그럼 재미있는 역사경영 시간으로 가볼까요?

Part 1. 카리브해의 디스토피아, 쿠바

쿠바의 시작과 미국-스페인 전쟁

쿠바를 발견한 콜럼버스가 쿠바에 도착하고 한 말은 "아름답다"였습니다. 그만큼 쿠바의 자연경관은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관광 산업을 통해 나라를 발전시켰다면 돈을 많이 벌었을 나라인데, 이러한 쿠바가 왜 카리브해의 디스토피아라고 불리게 된 것일까요?

쿠바는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라비아에서 넘어온 '설탕'이 상류층에게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수요가 많아진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통해 돈을 벌기 위해, 스페인은 쿠바를 식민지로 삼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탕수수를 얻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중노동이 필요했기에, 스페인인들은 체력이 약해 쓸모없던 쿠바의 인디오들을 죽입니다. 중노동을 견딜 수 있는 체력을 가진 서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쿠바로 데려오게 됩니다. 또한, 쿠바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뿐만 아니라 담배 재배가 잘 됐기에 스페인은 쿠바에 대규모 정예군을 두고 다른 나라에 뺏기지 않도록 경계하게 됩니다.

19세기에 들어 스페인의 힘이 약해지고 미국의 팽창주의가 시작되면서 미국이 쿠바를 탐내기 시작합니다. 이후 역사적으로 논란이 많은 '메인호 침몰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당시 쿠바에는 8000명의 미국인들이 살고 있었기에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이 최신예 전함인 메인호를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파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1898년 2월에 배가 갑작스럽게 침몰하게 되며 미국 수병 26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미국은 스페인 기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며 스페인과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만들었고, 결국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에서는 팽창주의로 막강했던 미국이 약해져가던 스페인을 쉽게 이깁니다. 미국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을 빼앗아 미국의 직할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쿠바는 미국의 직할 식민지가 아닌 독립국으로 만들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독립국가가 된 쿠바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쿠바의 대통령은 계속해서 친미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당한 투표로 결정된 대통령이 아니다 보니 좋은 대통령보다는 나쁜 대통령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가장 나쁜 독재자였던 모랄레스(Machado Morales) 대통령이 나오게 됩니다. 모랄레스는 언론과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정적을 모두 숙청해버립니다. 이러한 행동에 국민에게 지지를 잃자 미국이 그에게 경고를 줬지만, 모랄레스는 이를 거부합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중사를 모랄레스의 대안으로 세우게 됩니다.

1933년에 바티스타 중사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쿠데타를 주도한 바티스타는 대통령이 되지 않고, 7년 동안 7명의 꼭두각시 대통령을 세우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후 바티스타는 1940년에 직접 대통령 선거에 나와 당선되게 됩니다. 대통령이 된 후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나라를 잘 이끌었지만, 세금을 횡령하여 돈을 많이 모읍니다. 이후 권력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지만, 권력의 맛을 다시 보기 위해 1952년에 또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통령으로 자리 잡습니다. 재집권한 바티스타는 독재자가 할 수 있는 나쁜 일을 모두 하게 됩니다. 쿠바의 공공기업을 미국에 헐값에 넘기고, 쿠바를 당시 금주법을 피해 술을 마시러 다니던 미국인들을 위한 향락의 도시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러한 심한 독재로 인해 쿠바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대표가 되었던 사람들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체 게바라(Che Guevara)입니다.

카스트로는 사탕수수 농장주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며, 명문 아바나 대학교의 법학부를 진학해 변호사가 됩니다. 카스트로는 법조인으로서 헌법 소원을 통해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해 보려고 하지만, 헌법재판관 모두가 바티스타가 임명했던 사람들이었기에 기각당하게 됩니다. 이후, 무장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세력을 조직하고 있던 중 체 게바라를 만나게 됩니다.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귀족 집안 출신으로 남미 최고 명문 대학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하고 있는 남미 국가들을 보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공산주의를 이루겠다는 다짐을 한 후, 카스트로를 만나게 됩니다. 1958년에 두 사람은 함께 혁명을 일으켰고 바티스타를 쫓아내게 됩니다.

미국과의 단교와 독재자 카스트로

 

바티스타를 쫓아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부유층의 모든 토지와 기업 몰수 및 국유화, 국가의 모든 사업을 국유화하고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급진적 사회주의 정책을 펼칩니다. 이후,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인정을 받기 위해 1959년에 미국의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을 무작정 찾아갑니다. 그러나 당시 1950년대의 미국은 사회주의 정권을 굉장히 경계하던 때였기에 아이젠하워는 카스트로를 만나 주지 않습니다. 이에 화가 난 카스트로는 미국이 소유하고 있던 쿠바의 자산을 몰수하고, 미국인을 추방시키고, 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 세력 1만 4000명을 죽입니다. 미국도 이에 대항하여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쿠바와의 외교, 수출‧입을 단절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한 쿠바의 엘리트 계층을 '자유의 비행'이라는 오퍼레이션을 통해 전부 미국으로 이주시킵니다. 이와 같이 고급 인력이 없어진 쿠바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쿠바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고 카스트로가 총리, 체 게바라가 장관이 됩니다. 카스트로는 미국의 금수 조치로 인해 쿠바의 경제가 어렵자 소련에 붙어 친소파가 됩니다. 쿠바에서 친미파를 밀어내기 위해 일으켰던 쿠바 혁명이었는데 친소파가 된 카스트로를 본 게바라는 이에 반대하며 카스트로와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미 타락한 카스트로에게 게바라는 1965년에 결별을 선언하고 쿠바를 떠납니다. 이후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정착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지만, 사회주의를 견제하던 미국 때문에 CIA에게 체포당하고 사살됩니다. 카스트로는 그의 죽음을 이용하여 게바라를 사회주의 혁명의 영웅으로 만듭니다.

이후 1991년에 소련이 무너지면서 쿠바에 다시 경제 위기가 오게 됩니다. 소련에 의지하던 쿠바 경제에서 전체 수출량의 80%가 감소하자 카스트로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합니다. 이에 화가 난 카스트로는 1980년 5월에 쿠바의 마리엘 항구를 개방해 6개월간 12만 5천 명의 흉악범죄자, 전염병 환자, 정신병자 등의 사회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사람들을 전부 미국으로 이주시켜버립니다. 이후 미국과 쿠바의 사이는 극도로 안 좋아졌으며, 카스트로는 무려 52년간 집권하여 최장수 집권 독재자로 기네스북에 오르게 됩니다.

새로운 미국의 쿠바 정책

미국은 쿠바를 분해시키기 위해 몇 십 년간 금수 조치를 취했지만, 쿠바는 분해되지 않았습니다. 분해되지 않았던 절대적인 이유는 바로 쿠바는 모두가 가난한 절대적 빈곤, 절대적 평등 상태였기에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미국은 쿠바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상대적 박탈감과 상대적 빈곤을 위한 빈부 차이를 만들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시작한 사람이 미국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입니다.

그는 먼저 쿠바에 화해를 요청하며 쿠바를 향한 경제 제재를 풀어줍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쿠바인 200만 명에게 송금의 자유를 주고, 쿠바에 여행 자유화도 시켜줍니다. 여기에서의 쿠바인 200만 명은 과거 자유의 비행으로 미국에 넘어온 쿠바의 상류층이었으며, 그들이 쿠바에 있는 친척에게 돈을 보낼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여행 자유화로 미국 관광객이 늘어나고, 이를 통한 관광 산업으로 쿠바 상류층의 친척들이 큰돈을 벌게 되자 쿠바에 빈부 격차가 생기게 됩니다. 여전히 가난한 쿠바인들이 점점 불만을 갖기 시작하고 시위를 벌이자 쿠바는 다시 문을 닫게 됩니다.

모두가 잘 살고 평등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사회주의 혁명은 결국 모두가 평등하게 못 사는 나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쿠바는 우리나라가 수교하지 않은 국가 3개 중의 한 나라에 해당되며, 우리나라와 다른 이념을 가진 북한과 긴밀히 수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회주의를 택했던 나라는 내일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는 나라로 남게 된 것입니다.

Part 2. 영원한 선진국 후보, 브라질

브라질의 시작

인구 2억 1천만 명의 남미 최대 국가인 브라질은 남북으로 긴 영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쪽은 온대지방, 북쪽은 열대지방으로 남북의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발전에 상당한 제약이 따릅니다. 인구도 많고 영토도 꽤 크지만, 브라질은 안타깝게도 선진국이 되지 못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입니다. 브라질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역사를 시작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라질은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으며, 포르투갈의 항해자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이 브라질을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에 도착한 후, 발견한 것은 브라질에 살던 원주민 인디오 부족이었습니다. 260부족이나 되는 많은 인디오 부족이 있었지만, 아무런 문명도 없이 그저 원시 부족 수준의 삶을 살던 인디오들을 보고 포르투갈인들은 굉장히 놀라게 됩니다. 때문에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인디오들을 제압할 때, 아주 손쉽게 제압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후,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고 포르투갈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돈이 되는 사업을 브라질에서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라질의 돈벌이 수단 4가지(사탕수수, 라텍스, 소고기, 콩)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 브라질에는 당시 돈이 잘 되던 사탕수수 농장이 들어서게 됩니다. 농장을 만든 유럽인들은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옵니다. 500만 명의 흑인 노예를 데려와 일을 시켰고, 브라질은 세계 최대 사탕수수 수출국이 됩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도 자메이카, 쿠바 등의 가까운 나라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기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노예를 데려온 브라질은, 가장 늦은 1888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한 나라가 됩니다.

경쟁이 심해지자 사탕수수 다음으로 브라질이 찾은 돈벌이는 바로 천연고무 라텍스였습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고무에 대한 활용도와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고무의 원료가 되는 고무나무는 다른 나라에 굉장히 드물게 있었지만, 브라질에는 고무나무가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브라질은 라텍스 독점 생산과 수출을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브라질의 독점 생산과 수출로 인해 많은 값을 주고 라텍스를 사야 했던 영국이 브라질의 경제를 다시 위기에 빠지게 합니다. 정부의 명을 받은 영국의 헨리 위험(Henry A. Wickham)이 브라질의 고무나무 종자 7만 개를 밀반출하여 영국의 식민지에서도 라텍스를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독일에서도 석유로 만든 합성 고무가 나오면서 브라질의 라텍스 산업은 몰락하게 됩니다.

사탕수수와 라텍스 산업의 몰락 이후, 브라질은 소고기와 콩으로 다시 한번 도약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소를 키우기 위해서는 초지가 필요하기에 브라질은 아마존 정글에 불을 질러 초지를 마련합니다. 이후, 브라질은 소 2억 마리를 키우며 세계 최대의 소고기 생산국이자 수출국이 됩니다. 또한, 미국과 무역전쟁을 하던 중국에 콩을 수출할 기회가 찾아옵니다. 미국산 콩과 옥수수를 먹이며 돼지를 키웠던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전쟁으로 미국산 콩을 수입을 하지 않기 위해 땅이 큰 브라질에 콩 산업을 제안합니다. 땅이 크고 비옥한 브라질은 콩 산업을 시작했고 중국에 콩을 수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고기와 콩을 얻기 위해 아마존 숲에 불을 많이 질러 환경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세계 최악의 빈부 차와 노동자 출신 대통령, 룰라

브라질의 인종은 백인 17%, 흑인과 물라토 60%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17%의 백인층이 사회의 주류층이고 60%의 흑인과 물라토가 하류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브라질은 정확한 인종 구성비를 파악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브라질은 미국과 같이 부모 중 한 사람이 흑인이면 자식도 흑인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인종을 정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줍니다. 이 때문에 흑인임에도 백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정확한 인종 구성비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최소 60% 이상의 흑인과 물라토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죽음의 빈민촌이라고 불리는 파벨라(Favela)는 브라질 전역에 걸친 슬럼가로, 이곳의 절반은 유색인종입니다. 전기, 수도시설, 교육 등이 전혀 없으며 기초 인프라가 마비된 곳입니다. 강력 범죄와 조직 간 전쟁의 온상으로, 일상화된 마약 밀거래와 불법 총기 거래가 만연하고 게릴라 전투급 총격전이 빈발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 ‘룰라’(Lula)가 등장합니다.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 룰라는 처음으로 브라질에 노동자, 농민, 민중을 생각하는 복지제도를 시행합니다.

2003년 당선 이후 외채를 변제하고 상류층 증세를 시행하지 않으며, 외국과 국내 기득권층 모두에게 호감을 얻습니다. 공무원들의 월급과 연금을 줄이면서 재원을 마련하여 기아와 빈곤 퇴치를 최우선의 국가 목표로 삼았습니다. 당시 철광석 수출 증가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재정을 복지에 투입하며,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조건으로 빈민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소득이 늘고, 고용이 증가하며 생산량도 늘게 되는 선순환 구조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83%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을 받은 룰라가 퇴임을 하자마자 중국 경제가 7%로 꺾이면서 국제 철광석 가격이 내려가 브라질 경제에 타격을 입게 됩니다.

브라질의 한계

브라질은 노예제도를 가장 늦게 폐지한 나라인 만큼 큰 인종차별이 존재합니다. 미국에서와 같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아닌 직업적인 부분에서의 인종차별이 특히 심합니다. 1950년도에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흑인 체육부 장관이 된 축구선수 펠레를 제외하면, 브라질에는 지금까지 흑인이 장관에 오른 경우가 없습니다. 또한, TV 방송에 나오는 아나운서, MC 등의 사람은 전부 백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내거는 조건 중에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이 있는데, 이러한 회사에 흑인이 지원하게 되면 무조건 떨어지게 되는 등의 심각한 직업적 인종차별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바로 브라질입니다.

선진국이 되려면 먼저 도로를 뚫고 철도를 놓는 인프라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브라질은 공무원과 고위층의 부정부패가 만연해 탈세를 하고, 이로 인해 세수가 부족하게 되면서 필수적 인프라 구축이 마비되었습니다. 또한, 공교육의 질적 향상이 문제가 되면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인재가 부족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경우 세계 5위에 달할 정도로 땅도 넓고 세계 3대 식량 수출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브라질은 선진국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영원한 선진국 후보라고 생각합니다.


제25기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9주차 리뷰를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8주차에 이어 9주차도 역시 굉장히 유익한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저희는 10주차 수업 리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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