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인접 국가 /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25기』 북중미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흐름 8주 차: <조용한 캐나다와 시끄러운 멕시코>

안녕하세요!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사무국입니다.

오늘 리뷰는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25기 8주차 입니다!

저번 시간에는 미국 정당의 역사와 바이든 정부 정책의 이해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지난 시간의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25기』 북중미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흐름 7주 차: <미국 정당의 역사와 바이든 정부 정책의 이해>

오늘은 세계통찰 시리즈 저자 이지성 작가님과 함께

조용한 캐나다와 시끄러운 멕시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자, 그럼 재미있는 역사경영 시간으로 가볼까요?

etc-image-0
etc-image-1

Part 1. 북미의 조용한 나라, 캐나다

캐나다의 시작

etc-image-2

미국에 비해 캐나다는 굉장히 조용한 나라입니다. 캐나다인들은 미국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부르며, 미국인들은 캐나다를 '재미없는 천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처럼 미국은 총기 사고, 범죄 등 온갖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캐나다는 그런 일 없이 평화롭죠. 하지만, 이러한 평화가 캐나다에게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캐나다에 대한 유튜브 검색어 순위 1위가 바로 '캐나다 이민 절대 오지 마라'라고 합니다. 요양이나 관광을 위해서 캐나다를 방문하는 것은 좋지만, 이민이나 정착을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죠.

캐나다는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 2위나 되는 큰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토의 90%가 쓰지 못하는 땅이기 때문이죠. 미국 국경지대에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조금 있고, 그 위로는 전부 동토로 얼어있는 땅이기에 사람이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캐나다는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 이르면서 영토가 굉장히 큰데 캐나다의 주는 10개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캐나다는 영토는 넓지만, 그 넓은 영토 중에서 쓸모 있는 땅은 10%에 불과하기에 인구도 적고 발전이 더딘 것이 큰 문제입니다.

뉴프랑스-퀘벡

etc-image-3

캐나다는 미국과 굉장히 가까운 형제국가로 영어권 나라입니다. 하지만, 캐나다를 개척한 나라는 바로 프랑스이고 과거 프랑스의 땅이었습니다. 1534년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캐나다를 처음 발견했고, 그곳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카르티에는 원주민들에게 이곳이 어딘지 물어봤고, 원주민은 '우리 동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동네'는 원주민 언어로 '카나타(Kanata)'였기에 '캐나다'라는 곳으로 알아들었고, 이 일이 캐나다 국호가 만들어진 유래가 되었습니다.

카르티에가 캐나다를 발견한 후, 프랑스인들이 점점 캐나다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캐나다에 진출하는 목적은 정착이 아닌 '비버'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유럽의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겨울철에 가죽으로 된 옷을 많이 입었고, 그러한 유럽의 상류층이 가장 좋아하는 가죽이 바로 비버 가죽이었습니다. 비버의 가죽을 얻기 위해 비버를 잡는 사냥꾼들이 대거 캐나다로 유입되면서 캐나다가 점점 프랑스의 영토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캐나다로 들어온 프랑스인들은 캐나다의 원주민 인디언들과 교역을 통해 비버 무역을 활성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버 무역을 시작한 프랑스의 사냥꾼들과 상인들은 비버를 잡기 위해 퀘벡(Quebec)을 중심으로 캐나다의 내륙 쪽으로 깊숙이 파고들게 됩니다.

그동안 영국인들 역시 캐나다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교역이 목적이었던 프랑스인들에 반해 영국인들은 해안가 위주에 정착을 목적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정착이 목적인 영국인들은 캐나다에 살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고 영국인들이 점점 캐나다로 몰려오게 됩니다. 인구가 증가한 영국인들은 농사뿐만 아니라 돈이 되는 비버 무역까지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인과 영국인들 간에 충돌이 발생하게 됩니다.

프렌치-인디언 전쟁

etc-image-4

프랑스와 영국이 비버 무역의 오하이오(Ohio) 지역 영유권 분쟁을 시작으로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전쟁이 바로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1755년을 시작으로 1763년까지 꽤 긴 시간 동안 계속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력을 늘리다 보니 충돌은 어쩔 수 없던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이름부터가 굉장히 특이합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인데 마치 프랑스와 인디언이 싸운 것 같이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명칭이 생겨난 이유는 프랑스와 인디언이 힘을 합쳐 영국에 덤벼들었다는 것을 영국의 시각에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은 정착을 목적으로 캐나다에 유입되었기에 인구가 굉장히 많았지만, 교역이 목적이었던 프랑스는 인구가 굉장히 적었습니다. 영유권 분쟁을 하면서 프랑스는 인구가 많은 영국에 대적하기 위해 모피코트 무역을 함께 하던 인디언을 끌어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영국도 인디언을 전쟁에 끌어들이게 되고, 프랑스가 끌어들인 인디언은 오타와족, 영국이 끌어들인 인디언이 모히칸족이었습니다.

북미에서 시작된 전쟁은 유럽과 영국의 식민지까지 번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번져나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은 7년 전쟁의 시작이 됩니다. 7년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인도, 북미에서 벌인 전쟁으로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불릴 만큼 140만 명의 많은 전사자가 나오게 됩니다. 7년 전쟁은 1763년에 영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파리조약'을 통해 캐나다도 프랑스의 땅에서 영국의 땅으로 귀속됩니다. 캐나다에 살던 영국인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캐나다에 살던 프랑스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영어만을 쓰라고 강요하거나 프랑스 음식을 먹지 말라고도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믿던 가톨릭을 포기하고 영국의 성공회나 개신교를 믿도록 강요하기도 합니다. 10년에 가까운 심한 박해로 인해 일부 프랑스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캐나다에 사는 프랑스인의 수는 더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1774년부터 영국은 '퀘벡 헌장'이라는 것을 만들어 프랑스인에 대한 탄압을 멈추게 됩니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부터 7년 전쟁까지 전쟁 비용을 많이 지출한 영국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세금을 많이 걷게 됩니다. 이로 인해 미국이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영국은 미국과 퀘벡의 프랑스인들이 함께 손을 잡고 영국에 저항할까봐 탄압을 멈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13개의 식민지가 단합하여 1776년에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미국과의 관계

etc-image-5

과거 미국과 캐나다는 지속적인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1775년, 독립전쟁이 벌어지기 바로 전에 미국의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퀘벡주에 살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함께 영국을 누르자며 사신을 보내지만, 프랑스인들은 이를 거절합니다. 이에 화가 난 워싱턴이 퀘벡주에 군사 1200명을 보내지만, 퀘벡주를 지키고 있는 영국군이 있었기에 지게 됩니다. 이 일이 미국이 캐나다를 침공한 첫 번째 사건이 됩니다.

이후 미국이 독립전쟁을 일으켰지만, 모든 미국인이 독립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미국인의 4분의 1은 영국의 국왕을 따르게 되었고, 영국은 그들에게 캐나다의 땅을 많이 하사해 주었습니다. 이때 캐나다로 들어온 미국인들이 오늘날 캐나다의 주류가 됩니다. 이와 같이 캐나다의 많은 인구가 영국을 추종하면서,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던 미국과 캐나다의 적대적인 관계가 계속됩니다.

이후 1812년에 영미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의 유럽은 나폴레옹 1세(Napoléon I)가 일으킨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아메리카 대륙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선제공격을 하게 됩니다. 퀘벡주의 주도인 몬트리올(Montreal)을 점령해버리고, 이 일이 미국이 캐나다를 침공한 두 번째 사건이 됩니다.

그러나 퀘벡주에 살던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똘똘 뭉쳐 미국에 반격했고, 워싱턴 D.C.(Washington, D.C.)를 점령하여 미국 대통령궁에 불을 지르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새까맣게 불에 탄 대통령궁을 하얀 페인트로 칠하게 되었고 '백악관(The White House)'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과거에는 사이가 좋지 않던 미국과 캐나다이지만, 지금은 둘도 없는 형제국가입니다. 두 나라가 맞댄 국경선은 8,893km로 매우 넓지만, 철조망 같은 것 없이 자유롭게 넘어 다닐 수 있습니다. 또한, 강력한 미군이 있기에 캐나다에는 군대가 거의 없으며, 경제적인 면에서도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이 있기에 수출의 77%, 수입의 53%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원주민 탄압의 어두운 역사

etc-image-6

과거 캐나다는 원주민들에게 모진 짓을 많이 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인들이 캐나다에 들어오고 팽창하면서 원주민들에게 계약서를 통해 협정을 맺고 땅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땅은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고 하는 애니미즘의 사상을 믿던 인디언들은 평화와 신뢰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관용적으로 땅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인디언들이 자신들을 무서워하여 땅을 내어준 권리의 양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디언을 탄압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못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영국 장교 제프리 앰허스트(Jeffrey Amherst)입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천연두에 면역이 있었지만, 인디언들은 없었습니다. 이를 안 앰허스트는 천연두 균이 묻은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건네어 인디언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형편없는 종족을 싹 쓸어버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담요뿐 아니라 다른 모든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1828년도에 영국 정부이자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 학살 원칙’이라는 정부 정책을 내세웁니다. 원주민은 열등하며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다, 영국인의 생각은 옳고 원주민에게 강요할 수 있다, 과거 인디언과 맺은 조약은 모두 무의미하고 효력이 없다고 하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또한, 정부는 '동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인디언 아이들을 부모와 떨어뜨려 놓기 위해 기숙학교에 보냅니다. 이후, 머리카락을 자르고 영어를 쓰게 하며,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믿게 하고 영국식 교육을 시킵니다.

1876년에는 인디언 법을 제정했고 이는 원주민들의 토지 반납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특별 보호 지역이라며 인디언을 감금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일은 1864년부터 최근인 1990년까지 일어납니다.

오늘날의 캐나다

etc-image-7

1951년 12월에 정식 국명을 '캐나다'로 변경하고, 1965년 국기를 제정합니다. 그리고 1969년부터 공식 언어법에 따라 프랑스어와 영어가 공식 언어가 됐습니다. 캐나다는 발전과 한계가 명확한 나라입니다. 최대 수입원인 지하자원이 주로 동토의 언 땅에 있기 때문에 개발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문제와 자국 내 원유가 오일샌드(oil sand) 형태로 매장되어 있는 등 성장에 한계가 있어, 삼림이 풍부한 지형적 특징을 살려 펄프산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습니다. 캐나다는 독립된 외교권을 갖고 독립 국가들이 모인 영연방 국가로 의원내각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국의 여왕이 국가의 원수이고, 정부 수반은 캐나다의 총리입니다.

Part 2. 모순으로 가득한 멕시코

아즈텍 문명과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

etc-image-8

1325년 아즈텍족이 멕시코시티에 정착하면서 아즈텍 문명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변 민족들을 약탈하여 곡물을 얻어내야만 나라가 돌아가는 전형적인 약탈경제를 기반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후 빙하기로 인해 포유류들이 다 죽고, 자연재해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됩니다. 이로 인해 몬테수마 1세는 이웃 국가의 젊은 남성 인육을 먹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신화를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인근 피해 국가의 반발로 이어졌고, 아즈텍 문명의 멸망 원인이 됩니다.

1519년 스페인이 신대륙 발견이라는 명분으로 스페인 출신의 코르테스(Cortes)가 황금을 약탈하기 위해서 병사 508명과 함께 멕시코 땅에 상륙합니다. 그런데 당시 몬테수마 2세가 코르테스를 구세주로 착각하게 됐었습니다. 1512년에 코르테스는 주변 부족과 연합하여 문명을 붕괴시키고, 1521년에 멕시코를 세웁니다. 이후 스페인은 금과 은을 채굴하면서 원주민을 노예처럼 부리고, 멕시코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강압적 통치를 시작합니다.

이후 스페인인들이 멕시코에 정착하기 시작하며 멕시코에서 태어난 스페인 2세인 크리올료(Criollo)와, 스페인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아 메스티조(Mestizo)가 생겨나게 됩니다. 여기서 메스티조는 오늘날 멕시코의 하류층을 형성합니다. 계속된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1810년 9월 15일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달고 신부(Miguel Hidalgo y Costilla)가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1821년 8월, 독립운동을 일으킨 지 10년 만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독립 이후 10%에 미치지 못하는 스페인계 백인이 멕시코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게 되며 정치권력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개방경제의 부작용, 양극화와 범죄 왕국

etc-image-9

1917년 멕시코는 국유화정책을 하며 내수 위주의 폐쇄정책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경제 위기가 오게 되고, 1994년에 개방경제체제로 선회하며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합니다. 멕시코는 미국 기업의 생산 공장 건설과 저렴한 인건비를 유인책으로 일자리 창출 효과를 기대하며 개방경제 체제를 시행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또한,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저가의 미국산 농산물로 인해 멕시코 농민은 치명타를 입게 되었습니다. 멕시코 경제는 붕괴 직전까지 가게 되었고, 멕시코의 농민들은 ‘사파티스타’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마르코스(Marcos)라는 지도자를 내세워 남부 지역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2007년 세계 최고의 갑부에 선정된 멕시코의 통신재벌 카를로스 슬림은 정경유착을 통해 부를 축적하며 통신, 금융, 건설, 유통, 방송, 호텔 등 모든 분야로 진출하면서 멕시코의 부를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된 이후 근로자의 실질 임금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71년 만의 야당 출신 비센테 폭스(Vicente Fox)가 당선된 후, 부정부패 척결과 공평한 소득분배를 공약하며 개혁의 첫걸음으로 마약 밀매 조직 소탕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부작용이 생겨나고, 심각한 사회 문제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모순으로 가득한 멕시코

etc-image-10

멕시코에 살던 국민들은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빈곤과 이에 따른 범죄로 인해 유일한 탈출구인 미국으로의 불법 밀입국을 선택합니다. 이렇게 밀입국한 멕시코인들은 미국인이 꺼리는 직업에 종사하며 법정 최저임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멕시코는 전 세계 7위권의 석유 생산 국가이자 금과 같은 다양한 광석이 나오는 세계적인 자원 부국이기도 합니다. 또한, 한국의 스무 배에 달하는 영토와 1억 2천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갖고 있기에 튼튼한 내수를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부패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이로 인해 양극화가 더 심화되고 그에 따른 빈곤과 범죄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멕시코의 오늘입니다.

etc-image-11

제25기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8주차 리뷰를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7주차에 이어 8주차도 역시 굉장히 유익한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저희는 9주차 수업 리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

etc-image-12
 
etc-image-13
 
etc-image-14

* 저희 역사최고위조찬 사무국은 안전한 교육 환경뿐 아니라 원우 분들이 수업에만 집중하실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세팅하고 있습니다.

※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은 매주 영상을 녹화하여 실시간 송출과 재시청이 가능하도록 인터넷 영상과 교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전경련 역사최고위조찬!

최고의 멤버들과 함께 수준 높은 인문학/역사 교육을 들으면서

품격 있는 조찬을 즐겨보세요!

함께 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연락 부탁드립니다~

신청방법

2가지 방법 중 편한 방법으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1. 홈페이지에서 신청 (아래 배너를 클릭하시면 홈페이지 신청 창으로 이동합니다)

etc-image-15

2. 간편 신청 (아래 배너를 클릭하시면 간편 신청 창으로 이동합니다)

etc-image-16

etc-image-17

etc-image-18

** 홈페이지로 이동하시면 상세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홈페이지 내 공문 및 신청서 다운로드 가능)